국립박물관 전시품 관람규칙-[전부개정 2009.10.19 문화체육관광부령 제44호] 제 9조

연혁정보보기 제9조(행위의 제한) 박물관장 및 지방박물관장은 전시품의 보호, 쾌적한 관람환경 조성 및 원활한 관람질서 유지 등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 다만, 제2호의 행위에 대하여 사전에 박물관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위 또는 담배를 피우는 등 다른 관람객의 관람환경을 현저히 저해하는 행위

2. 전시실 안에서 조명이나 받침대를 이용하여 촬영하는 행위

3. 전시품을 만지거나 훼손하는 행위

4. 음식물을 전시실에 반입하거나 전시실 안에서 섭취하는 행위

5. 박물관 안에서 영리행위를 하거나 취사 또는 노숙하는 행위



그러하다

타이밍 기막히네

이럴때 풍Q가 나타나냐...

이거, 누가 사주한건가;;;


인간으로써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버렸습니다.

그건 바로....



사촌동생에게 이놈을 사줬거든요

음...

결코 악의를 품고 그런거 아니에요;;;

진짜라니까;;;

사랑한다 동생아

하나 물어봄

김호동 교수님이 따위임? ㅎㅎㅎㅎ

경기병 VS 중기병?

실제 사례로 비교해 보는 경기병 vs 중기병

경기병 VS 중기병?


1241년 4월 9일, 폴란드의 리그니차 평원에서는 유럽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투가 펼쳐졌습니다. 저 멀리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고 무슬림들의 휘황찬란한 도시를 약탈하고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지옥에서 온 악마들, 타타르족과 이들로부터 기독교 세계와 왕국,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십자군들이 맞붙었습니다. 폴란드 왕국의 경건한 왕, 안리크 2세의 지도아래에 동유럽 최강의 기사단으로 알려진 튜튼기사단을 이끌고 전장으로 도착한 포포 본 오스테르나와 미에즈코 공작, 모라비아 후작의 아들인 보레슬라브 등 막강한 정예 기사들과 유럽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영웅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현란한 몽골군의 기동과 강력한 위력아래에 연합군은 패배하였고 유럽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습니다.


근데 잠깐, 여기서 하나 의문을 제기해봅시다.


과연 이 전투는 튜튼기사단이 참가했을까요? 이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 전부가 유럽에서 내놓으라는 영웅들이었을까요? 유럽 최고의 정예 병력들이 맞긴 맞는 걸까요? 리그니차 전투가 유럽과 기독교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였을까요? 마지막으로 본 주제로 넘어가서, 과연 이 전투가 중기병이 경기병보다 우월함을 증명해주는 전투였을까요?

이렇게 많은 의문이 존재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직면할게 아니라 약간의 시간과 장소를 돌려 다른 전투로 이동하겠습니다. 1241년 4월 11일, 헝가리 모히 강입니다.

솔까역사님께서는 소설 ‘해 뜨는 낙원을 찾아서’를 인용하셨습니다.


처음 교전이 시작되면 먼저 훈투족은 돌격부대를 적의 정면에 보내어 짧은 돌격전을 벌인다. 이 돌격전은 대부분 적의 견고한 방어대형을 뚫지 못한다. 그러면 이 돌격부대는 여의치 않은 듯 등을 돌리고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때 적들은 자신들이 훈투족을 제압했다고 대부분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 놓고 도망가는 훈투족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도망가던 훈투족의 병사들이 말위에서 등을 돌려 추격하는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훈투족 궁수들의 활솜씨는 매우 정확하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적들은 달리는 말위에서 뒤돌아보며 활을 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때 훈투족을 쫓던 많은 적들이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도망가던 적들도 이미 퇴로가 막혀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교전초기에 적이 훈투족의 돌격에 대한 방어에 몰두하고 있는 틈을 타 미리 훈투족의 잔여 병사들이 적의 측면을 돌아 배후를 포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적은 궤멸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전 솔까역사님이 인용하신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고 이 소설의 문학성이 결코 낮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솔까역사님께서는 드신 예시로 볼때 몽골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그리고 중무장은 필요없다는 투로 헝가리군을 격파했다는 걸로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서울대 몽골사의 김호동 교수님은 이 모히전투에서 오히려 몽골군이 고전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상략) 바투는 헝가리인들과 싸울때도 큰 실수를 저질렀다. 1241년 봄, 몽골의 분견대는 리그니츠에서 유명한 전투를 치뤘다. 그 무렵 본대는 바투, 오르다, 쉬반, 카단, 수베에테이가 이끄는 다섯 개의 부대로 나뉘어42 카르파티아 산맥을 지나 사요 강으로 향했다. 두 군세는 강을 앞두고 서로와 마주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바투와 다른 왕공들은 ‘적의 군세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이상 진격하기를 꺼렸다. 그러자 수베에테이는 5개의 부대가 나누어져 각각 강의 다른 지점에서 도하한다는 ‘기발한 술책’을 제안했다. 왕공들의 지휘를 받는 4개의 부대는 상류나 중류에서 도보로 또는 다리를 이용해 강을 건넌다. 수베에테이가 이끄는 마지막 부대는 강의 하류를 건넌다. 헝가리인들은 그 곳의 수심이 몽골인들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너기에는 너무 깊다고 생각해 그 곳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몽골인들이 동물 가죽이나 나무를 이용해 뗏목을 만드는데 아주 능숙하다는 사실을 몰랐음이 틀림없다. 수베에테이의 생각은 뗏목을 통해 강을 건너 적의 후방을 급습하는 것이었다.

  그의 ‘술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한 공격이 세심하게 조작될 필요가 있었고, 그중 시기 선택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바투는 그의 군대에게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진군을 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수베에테이의 군대가 강을 건너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심지어 몽골군이 강의 반대편에 모였을때도 바투는 “적의 수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며 후퇴하려했다. 그러자 수베에테이는 “만약 그렇다면 홀로 후퇴하시오! 나는 투나(= 도나우)강과 마차(= 마자르)성에 가보기 전까지 후퇴할 생각이 없으니 말이오”라 말하며 돌격했다. 《원사》에 따르면 이에 낙담한 바투는 공격에 가담했다.43

  라쉬드 알·딘에 따르면, 몽골 장군들은 헝가리인들을 격파한 후인 그해 겨울, 티사강과 다뉴브강에서 휴식을 취했다.44 또, 《원사》는 그 해에 몽골군이 후닝(사요)강을 건너 큰 연회(dahui)를 열어 마유주와 포도주를 마셨다는 사실을 알려준다.45 이 사료들은 헝가리인들에게서 승리한 뒤인 1241년 여름에 사요강, 티사강 또는 다뉴브강, 셋 중 한 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모임에서 바투는 후닝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불평하고 수베에테이가 늦어 자신의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며 수베에테이를 비난했다. 수베에테이는 바투의 성급한 움직임 때문에 그가 늦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바투는 그것이 그의 실수였노라고 인정했다.”46


42 《元史》에는 이 전역에 참가한 몽골 왕공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Badu’, ‘Wuliwu’, ‘Xiban’, ‘Hadan’. 펠리옷에 의하면, ‘Wuliwu’는 오르다와 같은 사람이다(Notes sur l’Histoire de la Horde d’Or, pp. 30–32). 구육과 뭉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데, 나는 그들이 그 시점에 어딘가에서 다른 작전을 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43 《元史》, 121/2978(수베에테이傳).
44 Rashīd al-Dīn, Successors, p. 70.
45 《元史》, 121/2978(수베에테이傳). cf. Vernadsky, The Mongols and Russia, pp. 55–56.
46 《元史》, 121/2977-8(수베에테이傳).

Hodong Kim. (2005). A Reappraisal of Güyüg Khan. In Reuven Amitai & Michal Biran (eds.), Mongols, Turks, and Others (pp. 309-28). Leiden, The Netherlands: Brill.의 318 ~ 19쪽에서 인용.


여기서 몽골군이 비록 헝가리인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바투가 동요를 하고 직접 돌격을 해야 했으며 또한 많은 사상자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야만 했습니다. 물론 여기선 경기병이라던가 중기병이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몽골군이 꽤나 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문제는 몽골이 맞붙었던 폴란드와 헝가리입니다. 당시 폴란드는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상태였으며 100년 후에는 앙숙이던 튜튼기사단에게 패하는 등, 아직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습니다. 비록 헝가리가 13세기를 기점으로 서유럽의 군사문화를 받아들이고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동네 왕초들에 비하면 아직은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 과연 몽골군은 중기병을 운용하지 않았을까요?

이미 이 문제는 여러 연구와 조사, 그리고 발굴을 통하여 해결된 문제입니다. 비록 경기병이 많다고는 하나 중기병 또한 상당수였으며 러시아 칼가강에서는 이들의 돌격으로 마지막으로 저항 중이던 슬라브 중보병들을 박살냈습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모히 전투에서도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 건 다름 아닌 몽골의 중기병들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번 글에도 언급하였지만, 옛날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유럽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몽골인들이 우랄 산맥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 러시아를 침략하기 전, 이미 그들은 경기병과 접촉하고 운영해본 경험이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경기병을 택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는 기동성이 높은 경기병보다는 오히려 방호력과 충격력이 높은 중기병이 유리했습니다.

모히 전투후의 헝가리가 그것입니다. 헝가리의 벨라4세는 오히려 서유럽의 군사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1284-85년에 걸친 몽골의 헝가리 재침략은 몽골의 참패로 끝납니다.


물론 전쟁에서 어느 병과가 꼭 우세를 점한다고는 힘듭니다. 최강이라 알려진 로마의 군단병들도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고전했으며 스페인의 투창기병은 프랑스 중기병들에게 꽤나 재미를 보았고 파푸아 뉴기니의 저항군은 활로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인도네시아군을 괴롭혔으니까요. 그렇지만 활로 무장한 병력이 자동소총을 상대로 이겼다고 해서 활이 자동소총보다 우월한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스터 술탄님의 말씀대로 하는게 정답일겁니다. ^^


'내가 팔랑크스 하고 니가 레기온 해서 1개 중대씩 이끌고 최선두에서 돌파가 되나 안되나 붙어보자'”

-레기온VS팔랑크스 논쟁에서 상대의 정신승리에 지친 미스터술탄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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